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金日成 출생에서 사망까지 2.피와 공포로 일관 권력투쟁가
1912.4.15 평남대동군고평면남리 만경대출생 26 만주 화전현 화성의숙 수학 27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,재학중 共靑가입 31 중국공산당 입당 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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세계사 유례없는 49년 권좌/김일성 출생에서 사망까지
◎한국민엔 용서받지 못할 전범 낙인/6·25실패후 반대파 숙청 재기성공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사망했다. 김일성처럼 극단적인 평가속에 살다간 인물도 드물 것이다.그는 북한주민에게「위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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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5.남로당파 제거 30.
金日成수상에게 朴憲永의 사형선고에 따른 대책을 보고하고 돌아온 내무상 方學世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. 그는 곧바로 간부회의를 진행했다. 『수상동지께서도 재판결과에 대해서는 만족하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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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4649)내가 치른 북한숙청(31)|전 내무성부상 강상호|남로당 파 제거(26)
다음날 김일성 수상은 조사단을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, 아침을 함께 하며 회담을 계속했다. 수상이 외국인을 별장으로 초대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. 전날 밤 회담중 일방적으로 자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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스탈린,김일성에 남침강요/미 시사주간지 보도
◎개전결심 굳힐때까지 집무실 밖 서있게/“1주일내 남 점령” 자신의 보좌관이 계획 구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은 지난 50년 북한군의 남침과 관련,개전 결정단계부터 깊숙이 개입했던 것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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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4648)제89화 내가 치른 북한숙청(30)|전 내무성부상 강상호|남노당파 제거(25)
조사단은 김일성 수상이 나타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소련말로 『수상님, 안녕하십니까. 오랜만입니다』라고 인사하는 등 국가수반에 대한 깍듯한 예우를 갖추었다. 김일성 수상도 조사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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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4647)제89화 내가 치른 북한숙청(29) 전 내무성부상 강상호
(24) 53년말께였다. 주광무 예심처장실에서 느닷없이 큰 소리가 들렸다. 주광무가 박헌영 부수상을 조사하면서 내뱉은 협박성 고함으로 들렸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나하고 그 방을 찾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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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4646)제89화 내가 치른 북한 숙청-남로당파 제거(23)
노동당 중앙 위원회 전원회의가 당사자인 박헌영 부수상이 불참한 가운데 출당 조치와 함께 재판에 회부키로 결정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. 물론 내무성은 이 전원회의가 열리기 전부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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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4637)|제89화 내가 치른 북한 숙청 (19)|남로당파 제거 (14)|전 내무성부상-강상호
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소환돼온 주영하는 내무성 보안 요원들에 의해 공항에서 곧바로 중앙당 간부학교 (교장 박태화·소련파) 합숙소로 연행됐다. 그는 이곳에서 연금 생활을 하며 내무성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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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4629>내가 치른 북한숙청
남노당파 제거가 시작됐음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정확히 52년초부터였다. 박헌수부수상이 자동차를 빼앗겼다는 소문이 당정 일부 고위간부들사이에 나돌기 시작했다. 이를 귀동냥한 고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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남기고 싶은 이야기들|내가 치른 북한 숙청
감시망 강화하며 「올가미」 준비 김일성 수상은 50년 12월 박헌수 부수상 겸 외무상(군사위원)에게 중장계급부여와 함께 인민군 총 정치국장을 겸임토록 했다. 개편된 인민군 총 정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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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4624)제89화 내가 치른 북한 숙청(6)
(1) 남로당파 인사들의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52년 10월부터였다.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북한의 숙청사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였던 남로당파 숙청사건은 북한정권 수립 때부터 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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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4622)|내가 치른 북한숙청(4)-전 내무성부상 강상호 |허가이 암살
허가이는 김일성이 수령이 되기까지 산파역을 맡았다. 그는 김일성의 가장 긴밀한 협력자였을 뿐 아니라 후견인이었고 보호자였다. 그는 소련군 대위계급장을 달고 입북한 33세의 청년 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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강상호는 누구인가
강상호씨는 1909년 구 소련 땅 원동 연해주에서 출생, 할아버지 때 함북 회령에서 국경을 넘어 원동으로 이주한 뒤 태어난 한인3세. 원동공산대학 당과를 졸업, 시베리아 우스리스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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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헌영 스탈린에 김일성 비판편지(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:80)
◎소의 김일성선택:하/“통일노선 안맞고 국내파 무시 당 분열”/크렘린서 수긍… 김·박 불러 「면접시험」 ◆DB 편집자주:본문생략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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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스탈린 공군지원 꺼려 중공군 한때 참전 보류”/6·25 비사
◎중공 당사자료집/미와 충돌 피한듯 6·25에 개입,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간 중공군이 참전과정에서는 소련측의 공군력 지원 거절로 한때 참전결정을 보류하는 등 개입을 망설였던 사실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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「항일」내세워 김을 지도자로(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:40)
◎김일성 선택과 소군부 역할:하/이승만 귀국알고 서둘러 입북시켜/토지개혁등도 김의 이름으로 추진 평양주둔 소 25군 사령부는 제1전선군 군사정치위원 스티코프상장의 「절대비밀」지시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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「지도자김」은 소극동군 작품(비록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:39)
◎김일성선택과 소군부 역할:상/스탈린 총애받은 스티코프가 주도/김 입북 한달전 부하보내 정지작업 소련군정이 33세의 청년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선택한 과정과 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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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중위세력손잡고 사회주의로통일”(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:38)
◎박헌영의 정치노선:하/소의 「찬탁」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/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 해방후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박헌영은 남북의 「당중앙」위치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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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헌영의 정치노선:상(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:37)
◎“해방직후 공산당재건 소와 합의”/8월18일 상경… 소 영사관과 극비접촉/광주서 지하활동 때부터 메시지 오가/증언자 고광표씨 쿨리코아씨 □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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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0)박헌영-김일성 5차 회동(1)|「좌우합작」문제 막판 절충
박헌영은 서울로 되돌아간지 나흘만인 46년7월말 다시 평양에 모습을 나타났다. 김일성과의 다섯 번째 회동을 위한 것이었다. 5차 회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. 45년10월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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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29)박헌영-김일성 4차 회동(3)
46년7월, 남과 북에는 제2의 「좌익세력개편」이 전격 시작됐다. 김일성을 실세로 부상시킨 분국의 등장이 첫 개편이라면 북조선공산당의 조선신민당(신민당)과의 합당, 조선공산당과 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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토지개혁 전국확대 공방(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:26)
◎박헌영김일성 비밀회동:4/국내파,지주많은 남조선은 완화주장/“찬탁운동 미지근” 박헌영에 호된비판 서울에서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박헌영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46년 4월5일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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스탈린/김일성 오른쪽 앉혀 낙점암시/45년만에 밝혀진 북한 비사
◎평양에 군용기 보내 김·박헌영 불러/“박은 지명도 낮다” 판단 탈락/“차기후보” 주위 위로에 박 불만없이 소에 수긍/면접뒤 연안파 합당등 김 체제 확립 【모스크바=김국후특파원】